Paranoid Paradise

Paranoid Paradise는 2013년 West Midlands 에서 벌어진 Dr McRae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느날 집 주변에서 Japanese knotweed를 발견한 그는 이 끔찍한 외래종이 자신의 소박하고 프라이빗한 가정을 파탄낼 것이라 생각하고 파라노이드에 시달리다 결국엔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 이상한 사건은 Japanese knotweed와 같은 지역에서 온 나에게 묘한 혼란스러움을 주었다. 이 혼란스러움의 정체가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살인사건에 대한 괴이함이었는지, 외래종의 침입으로 가정이 파탄날까 두려움에 떨었던 Dr McRae에 대한 연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은 고향을 떠나 악마가 되어버린 이주식물에 대한 동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tiger walking stick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도 뚫어버리는 이 악마의 뿌리는 잘 말리면 붉은 색의 Japanese knotweed tea의 재료가 된다.

호랑이 지팡이에 둘러싸인 이 비극적인 커플에게 이 붉은 차는 지독한 오해를 풀어줄 수 있을까.

차에 잠겨 비로소 형체를 드러낸 이 커플에게 한잔의 차가 그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는 위로가 될 수 있을까.

Kenneth McRae & Jane McRae

Paranoid Paradise, 125개의 지팡이와 나무조각안에 호장근 차, 가변크기, 2018

Paranoid Paradise, 125개의 지팡이와 나무조각안에 호장근 차, 가변크기, 2018

Paranoid Paradise- Dr McRae의 초상, 나무조각안에 호장근 차, 80x100x10(cm), 2018

Paranoid Paradise, 125개의 지팡이와 나무조각안에 호장근 차, 가변크기, 2018

Paranoid Paradise- Jane McRae의 초상, 나무조각안에 호장근 차, 80x100x10(cm), 2018

detail

mine/field

2000년도 내인생에서 처음 산 CD를 기억한다. 2000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 랩퍼들의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래도 주구장창 사랑이야기만 하던 기존의 대중가요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이고 솔직해보였기 때문인지, 모든트랙 모든 가사를 다 외울때까지 듣고 또 들었던거 같다. 왜 였을까. 그들이 한국말을 영어처럼 발음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라임이란 것을 맞추기 위해 아주 어색한 문장을 사용할 때에도 시적허용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음악보다도 그들

의 자유로움과 시스템에 저항하는 듯한 태도가 멋있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2000년대 초반, 한국 랩퍼들은 엉뚱하게도 한국에서 리얼힙합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힙합이 한국에 처음 들어오던 시기였으니 이해가 안가는 바도 아니지만, 어릴적 나의 우상이었던 그들의 음악은, 지금 들어보면 샘플링과 표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고 있고, 그들의 음악적 후손들은 드레이크와 미고스의 플로우를 자신의 곡으로 번안해내고 있다. 엉뚱하게도 한국에서 게토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가끔 총으로 상대를 위협한다는 가사를 쓰거나 심지어 n-word를 사용하기도 한다. 돈, 여자, 럭셔리카는 ‘started from the bottom’을 빌미로 이미 스웩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좋아하는 래퍼들이 나보다 어려졌을 때쯤, 내가 좋아했던 래퍼들은 장인 혹은 꼰대가 되었고, 그 치열했던 논쟁들은 지루해져버렸다. 대신 나는 한국힙합이라는 오렌지 씨앗이 어떻게 자랄지 지켜보기로했다. 20년 정도가 지나고 이 씨앗이 열매를 맺었을 때 쯤, 사람들은 이 오렌지인지 귤인지 모를 과일을 따기 위해 달려들었고, 나는 이 씨앗이 어떤 바람과 햇볕을 받으며 자라왔으며 무슨 맛으로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한국 전쟁때 minefield를 field of mine 으로 해석해서 대참사가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붕괴는 어떤 독일어를 잘 못하는 이탈리아 기자의 오역과 오보에서 비롯되었단다. 나는 이 오역들을 대 참사와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20여년전 그들이 가져온 오렌지 씨앗은 나중에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 근데, 한국에서 오렌지가 자라던가?

mine/field, 바닥위에 오렌지 껍질로 쓴 시, 가변크기, 2017

mine/field, 바닥위에 오렌지 껍질로 쓴 시, 가변크기, 2017

details

mine/field, 바닥위에 오렌지 껍질로 쓴 시, 가변크기, 2017

mine/field, 바닥위에 오렌지 껍질로 쓴 시, 가변크기,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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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e/field, TIMELAPSE, single channel video, 4min 41sec, 2017

mine/field, TIMELAPSE, single channel video, 4min 41sec, 2017

Lullaby

새로 들어간 작업실 정리를 했을 무렵이니 2013년 3월 즈음이다. 작업실 정리를 마치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던 중, 언제나 그렇듯이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의 눈은 자연스럽게 TV로 향한다. TV에선 북한에서 연평도를 향해 포문을 개방했다며 호들갑이다. 나는 속으로 시덥잖은 정치논리를 들먹이며, 정치 시즌에 맞춘 보여주기식 쇼일 거라며 무덤덤하게 TV를 바라본다.뉴스가 끝날 무렵, 으례 그렇듯 연평도 주민의 인터뷰가 나오고, 인터뷰를 하

연평도 어민의 인터뷰

는 어민은 자기네들은 포소리를 자장가 삼는다는 소리로 수십년간 반복된 포성으로 무뎌져 버린 관성과 나지막한 두려움을 동시에 섞어낸다. 이내 나는 다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기억도 나지 않는 대화들이 오간다. 집에 돌아와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켰을 때 아까 보았던 뉴스는 다시금 상기된다. 그날의 네이버 검색어 1위는 이니스프리 50%세일. 뒤늦게 찾아오는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포성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논리를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뉴스를 바라보는 나와, 살고있는 나라의 위협보다 더 관심이 집중된 화장품 세일, 그리고 반복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한다. 그날의 해안포 개방은 누군가에게는 시즌마다 다가오는 정치행사로,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조업을 나가야 하는 이유로,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나는 서울에게 그들의 자장가를 들려주기로 했다. 폭음으로 만든 자장가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누군가에게는 자장가로, 누군가에게는 폭음으로, 누군가에게는 소음으로, 누군가에게는 닿지도 않는 저 멀리의 소리였을 것이다.

Lullaby, single channel video, 3min 9sec, 2014

Lullaby, C-print, 2014

Drawing for Lullaby, water colour on paper , 18x24(cm), 2014

​好 Ho Whore

젊음, 문화, 자유 등 홍대를 설명하는 키워드와 상관없이 나에게 홍대는 ‘우리동네’ 였다.

이곳엔 함께 20대를 보낸 동료들이 있었고, 함께 걸어다닌 길이 있었고, 순진했지만 예술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할 의지가 있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낭만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홍대에 처음 왔던 때도 이미 변질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라고들 하지만, 향락과 유흥만 남아있는 지금의 홍대에 비하면 비교적 순수했고 모두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처음 갔

홍대 풍경

었던 당구장도 조기축구가 끝나고 가던 해장국집도,친구들과 어김없이 가던 민속주점도 이제는 다 카페로, 술집으로, 옷가게로 변해버렸다. 추억하던 풍경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낯선 이들과 이질적인 모습들만이 남아버렸다.

홍대에 살던 시절, 집으로 가는길이 너무 시끄럽고 번잡해 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 조용하던 골목을 사람들이 찾아냈을 무렵엔, 주인아줌마는 살고있던 전세집을 월세로 바꾸자고 했고 나는 주인아줌마를 원망하는 대신 이 골목을 소란스럽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했다. 어쩌면 홍대에 오는데 버스비를 내야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好 Ho Whore >프로젝트는 한 문화와 지역의 변화과정에 대한 고찰이라거나 역사에 대한 견해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변하는 상황들에 어쩔 수 없어져버린 나의 투정이나 분노정도가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홍대의 할로윈데이는 그러한 나의 감정과 홍대의 풍경을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요약본이다. 나에게 저 소란스러운 문화는 아직 어색하고 저 낯선 사람들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홍대가 말 그대로 홍대이던 시절, 그들의 낭만이 동네 사람들을 잠 못 들게  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저들의 낭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홍대 1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이 없어져도, 익숙한 풍경이 사라져도, 더 이상 거리에서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홍대는 누군가의 놀이터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 변함이 고약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변함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은 맞지만 절이 변해가는 것 조차 외면하라는 것은 중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다. 변해가는 절과 떠나는 중은 사파리카의 창살처럼 단절되었고, 나는 우리가 서로 같은 풍경 안에 속해 있었던 시절을 되뇌이며, 그 날의 사파리카처럼 홍대 주변을 서성거린다.

 

사파리카에서 바라본 홍대거리의 풍경은 내가 지금 홍대를 바라보는 시점과 동일하며 풍경 속 그들과 나의 간극은 사파리카의 창살만큼이나 아득하다.

好 Ho Whore, single channel video, 30min 41sec, 2014  

Exhibition view

好 Ho Whore, single channel video, 30min 41sec, 2014  

好 Ho Whore- the bridge, Oil on canvas, 193x130(cm), 2014  

好 Ho Whore- the bridge, pastel on paper, 100x72(cm), 2014  

好 Ho Whore, water colour on paper, 24x18(cm), 2014  

好 Ho Whore, water colour on paper, 24x18(cm), 2014  

好 Ho Whore, Oil on linen, 72x100(cm), 2014  

好 Ho Whore- safari car making film/ TIMELAPSE, single channel video, 40sec, 2014  

好 Ho Whore- safari car making film/ TIMELAPSE, single channel video, 40sec, 2014  

병천 순타이

1960년대 병천장

총인구 6000여명 남짓한  병천이라는 작은 마을에 30여개의 순대가게가 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가격에 같은 양을 제공하며 모두들 자기가 원조라고 주장한다.

 

원조논쟁은 한국사회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이슈이다.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원조라 자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원조의 홍수속에 더이상 원조는 원조가 아니게 되며, 원조가 아닌 것은 원조가 된다. 이는 더이

상 원조라는말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이 단어에 개입되어 있는 다양한 경제논리를 쫓는게 합리적으로 보이게 한다.

병천의 수많은 원조들 중에 자타공인 원조순대집 2곳의 오너들의 인터뷰와 작품의 결론부에 등장하는 인터뷰는, 자신들의 정당성 뿐만 아니라 / 병천이라는 작은 마을에 존재하는 병천순대협의회와 원조마케팅 이면의 카르텔 혹은 공생의 시스템을 암시한다.

 

원조는 누구인가. 아니, 원조는 무엇인가.

나는 무의미해져 버린 그들의 원조(originator)논쟁을 통해 원조(original)의 정체에 대해 질문한다.

병천 순타이, single channel video, 7min 12sec, 2012  

순대특공대, C-print, 2012  

병천 순타이, C-print, 149x20.15(cm), 2012  

병천 순타이, pastel on paper, 149x20.15(cm), 2012  

병천 순타이, oil on canvas, 65x53(cm), 2012